내 생에 가장 마음편하게 필기시험을 치른 날이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서 시험을 응시한다는 생각 자체를 처음해보았고, 그럴 마음을 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오늘은 내가 지원했던 금융기관의 필기시험이 있었던 날. 어제 새벽3시까지 잠들지 못해서 아침에 꽤 피곤함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가야했다.
시험보다 힘들었던 것이 그 학교까지 가는 것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도 높은 경사로 유명했는데, 이 학교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안되었다. 등산을 해도 이만큼 땀을 흘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땀나게 오르막을 올라갔다. 이미 온 몸은 땀으로 젖어있다. 여기서 내 등을 누가 건드리면 난 폭발할지도 몰라.
처음가본 이 학교는 아름다웠다. 서울의 경희대학교가 이런 느낌이었던가 한국외대가 이러했던가. 산 중턱에 놓여있는 건물은 유럽의 마을이 떠오르는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바라본 전망이 멋졌다. 계단을 경계로 지면과 산이 보이는 전경이 가로줄로 눈에서 나눠지는 그 풍경. 원근법에 의해 건물 옆으로 구름이 지나가는 풍경. 아름다웠다.
시험은 별 것 없었다. 어지간히도 관리감독이 안되는 시험운영도 놀라웠다.(방송멘트가 오류가 생겨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냥저냥 치고 나왔다. 결과야 나와봐야 알겠지만 적당히 틀렸을 것 같은데, 다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험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으로 시험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7년전의 내가 맞나 싶을정도의 여유. 사람은 확실히 성장한다.
오늘 하고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것은 시험을 치고 나오는 길에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분이었다.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 오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정말 좋은 분이었다. 이 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회사를 다니다 미래 자신의 모습이 직장상사의 그 모습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퇴사하고 다시 공부를 하고 있으셨다.
그런데 굉장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주일에 한번은 바닷가에 가서 서핑을 하고, 또 독서실 근처 식당을 이곳저곳 가보며 '고독한 미식가'를 체험하고 있다고 하셨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삶의 여유와 자유, 부러웠다. 사실 더 부러웠던 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서슴없이 걸 수 있다는 그 친밀함이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이유가 독서실에서 자주 뵌 것 같아서라고 한다. 이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이분에겐 말 걸 이유로는 충분했던 것이다. 나도 1시간 남짓 대화하였지만, 굉장히 좋은 분이셨다. 결혼한 대학교 여자후배가 해운대에 남편과 놀러왔다며 3명이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분의 성품에 대해선 확신할 수 있었다.
글이 길어져 다음 글로 넘길 내용이지만, 오늘은 내가 지금 다니는 독서실을 오는 마지막 날이다. 같은 점주님이 운영하는 2호점이 집 근처에 내일부터 오픈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전거로 10분거리라면, 내일부터는 걸어서 5분거리다. 그런 마지막 날에, 아는 분이 새로 생겼다는 점이 신기했다. (심지어 알고보니 고등학교 선배님이셨다!!!!)
독서실이라는 가장 고독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알게 되고 인간관계가 이어진다는 이 신비로운 경험. 오전에 치른 필기시험 같은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들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20.8.15.(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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