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내가 말을 전할 뿐.

 

 내 처지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비관을 하지 않으려 한다. 좋은 태도가 아닐 뿐더러, 마음이 한 번 무거워지면 그걸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좀 비관을 해야만 반대로 속이 풀릴 것 같다. 마음도 다잡고.

 내가 다니는 독서실에 굉장히 성실한 분이 있었다. 내가 그 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딱 2가지이다. 하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독서실에 와서, 아주 일정한 생활 규칙으로 공부하시는 모습.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열심히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의 표본과도 같은 성실함이 호감이었다.

 두 번째는 독서실에서 그 누구와도,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이 해야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조금만 친해질 법하면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한다. 그러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장점도 있지만, 내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이분처럼 자신이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럽게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많이 망설였다.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까, 존경스럽다고,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실 수 있냐고. 여러가지 말이 생각났지만,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데, 내 처지가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거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던 것이다.

 

달은 지고 뜨고, 밀물과 썰물은 반복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은 9년 전에도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일기장에 이와 관련한 글을 적어두기도 했다. 내용 전반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후회를 많이 했던 내용을 적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글을 적었다는 기억도 난다. 하지만 9년이 지났고, 나의 후회는 또 한 번 반복되려 한다.

 한 독서실에 오래 다니다 보면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아도, 대충이나마 어떤 공부를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하는 시험이 아니더라도, 독서실 곳곳에 붙어있는 각종 시험일정을 보다보면, 이 사람이 왜 요즘들어 이렇게 일찍 오는지, 그 사람은 왜 더이상 독서실에 오지 않는지도, 알 수 있다.

 내가 호감을 가진 이 분의 시험은 내일이다. 공교롭게도 나도 내일 시험이 있다. 서로 영역은 다르지만 둘 다 잘되기엔 나는 영 자신이 없다. 준비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그리고 어차피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에 긴장감도 없다. 좋지 않은 생각인 것은 나도 알지만..

 그런데 이 분은 다르다. 내가 아침7시에 독서실에 왔는데 이미 도착해있었다. 아마 내일 시험을 대비해서 마지막 준비를 하러 온 것이겠지. 그 열정이 부럽기만 하다. 나에게도 저런 열정이 있었던 적이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만 올라올 뿐. 지속되는 열정이란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은 몇 번이나 더 반복될까? 아니 반복된다는 것을 느낄 만큼 마음의 호감을 다른 이에게 느낄 수 있을까? 나중에는 피폐해지는 마음을 갖는 것이 두려워져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부터 앞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참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다만 지금과 같은 감정이 생겼을 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은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변변찮은 내용에 글만 길어진 듯하다. 그만큼 미련이 많이 남아서겠지.

혹시나 모를 지금도 짝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뭐라 해줄 말이 떠오르진 않지만

당신들이 적잖게 마음 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힘을 내자.

 

20.6.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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